“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시~인~세~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처~언~리~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모~옴.” 매주 월요일 밤 10시가 되면 시작되는 KBS 가요무대 시간에 오늘은 가수 송가인 양이‘꿈에 본 내 고향’이라는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 부르다 ‘내가 태어나기도 전 세상에 나온 노래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불리고 있으니 이 노래는 명곡 (名曲) 중의 명곡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.’는 생각을 하며 집사람을 보았더니 집사람도 따라 부르고 있었다.
그래서 “자기도 좋아해서 따라 부르는 거야?” 물었더니 “좋아해서가 아니고 송가인 양의 노래소리가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만드네.” “그랬어? 그러면 한 가지만 물어볼게.” “무엇이 궁금한데?”
“다름이 아니고 장인어른 살아계실 때 노래를 잘 부르셨을까?” “우리 친정아버지가 노래를 잘 부르셨냐고?” “당신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보니 갑자기 장인어른 솜씨는 어땠을까? 궁금해지네.”
“우리 친정아버지도 노래를 좋아하신 것 같아. 왜냐면 그때 우리 집에 라디오가 있었거든 그런데 집에서 거름을 뒤집는다거나 하는 일을 하실 때면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일을 하셨거든.”
“그랬어? 하긴 집에 라디오가 있었으면 그 시절로 보면 문명의 혜택을 많이 받으신 거네.”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.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었던 1960년대, 어머니와 함께 채소 장사를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아직 날도 채 밝기 전 이른 새벽 남의 밭에 나가 전날 오후에 갈무리해 놓았던 배추나 무를 손수레에 싣고 시장까지 날라다 한쪽에 쌓아놓고 팔았는데, 그게다 팔리기도 전 또 다른 밭에 가서 주인과 배추나 무를 흥정해서 또다시 시장까지 날라다 팔아야 하는 힘든 생활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.
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화물차나 경운기도 없던 시절이니 오롯이 모든 일은 손으로만 이루어 지던 시절이니, 그 힘들었음을 무어라 설명할 수 없겠지만, 그래도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열심히 노력하신 끝에 사글세 방을 전전하던 우리 가족은 어느날 방 하나에 부엌 하나가 딸린 조그만 집을 장만해서 이사할 수 있었는데 셋방살이 설움에서 벗어난 아버지도 물론이지만 어머니의 기쁨은 더 크셨던 것으로 기억된다.
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께서는 친한 친구 몇분을 초대하여 집에서 막걸리 파티를 열었는데 한 잔 두 잔 술잔이 오가자 “아야! 상진아! 저그 주조장에 가서 막걸리 잔 받아온나!” 하며 십원짜리 한 장인가 두 장 인가를 주셨던 것 같았는데, 하여튼 부지런히 술 심부름을 한 덕분에 약간 취기가 오르신 아버지 친구분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.
그리고 잠시 후 “어야! 자네도 한 곡조 부르란 마시!”하고 자꾸 아버지께 노래를 권하시는 친구분들과 “나는 노래를 못한단 마시!” 하며 사양하더니 “알았네! 그라문 내가 한 자리 부를 라네!” 하며 부르셨던 노래가 바로 ‘꿈에 본 내 고향’이었는데 그 시절 어린 내가 듣기에도 아버지는 그리 잘 부르지는 못하신 것 같았다.
그러나 지금처럼 TV는 물론이고 라디오도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았던 시절에 이른 새벽이면 밭에서 배추나 무를 실어다 시장에서 팔아야 하는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장소나 시간도 없었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하지만, 그날 이후 환갑도 되기 전 암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두 번 다시 아버지의 노래는 들을 수가 없었는데.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?/류상진 전 보성우체국 집배원